우리들의 인생은 단순히 밝은가, 어두운가 하는 것으로쉽게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어둠과 밝음 사이에는 그늘이라는 중간지대가 있잖아.그 그늘의 단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건전한 지성이야.
그리고..건전한 지성을 획득하려면 그 나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어?- 무라카미 하루키 <어둠의 저편> 중에서
* 사진 : 손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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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격렬했던 시기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나게 되어 아마 오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과거는 고통일까?
나는 그런 격렬한 고통이 없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땠을까. 그의 젊은날은 고통과 후회일까?
사실 하루키가 결정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전공투 세대인 그가 졸업 후사회와 타협하기 싫어서 보통의 직장인이 되지 못하고 재즈카페 주인이 되어버렸다는 대목에서였다. 내 맘대로의 해석일지언정, 나는 그 순진함과 결벽함에 반했다. 산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재즈카페 주인이 되어버리다니 좀 이상한 방향 선회 아냐? 하고 웃으면서도.
그 첫 정 때문에, 나는 아무리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상한 말을 해도 먼저 믿고 듣기 시작할 것만 같다.
"사실 어느 쪽 편드는 거, 전 싫거든요. 옛 사람들도 중용이 중요하다고 했고, 극단적인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 네.
강도를 만난 사마리아인을 보고 '나는 강도의 편도 사마리아인의 편도 들지 않겠다'며 그냥 가버리는 것은 중립이 아니다. 그런 중립은 건전한 지성의 결과도 아니겠지. 중립 그 자체는 대단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비겁한 판단유보가 아니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어느새 세상은 중용을 마치 패션처럼 사용한다. 그래봤자 사실 대단해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여전히, 똑똑한 양비론보다는 불타올랐다가 방패에깨진 머리통에 더 마음이 간다.
90년대 초 어느날 나는 학교 앞 거리를 걸으면서 문득 생각했다.
아마 훗날, 우리의 시대는 변절의 시대라고 불리겠지.(뭐래니. 진짜 그땐 좀 진지했나.)
그러나 10년쯤 지나고 보니 뭐라 이름 붙여질 '시대'로조차 기억되지 않는다.